조각가는 무(無)에서 형태를 만들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돌 속에서 형태를 꺼낸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 조각은 이미 대리석 안에 있다, 나는 그것을 가두고 있는 여분의 돌을 제거할 뿐이라고. 그러나 20세기에 세 명의 조각가가 이 오래된 믿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부수거나 확장하거나 뒤집었다. 로댕은 돌에 살아있는 살을 돌려주었고, 브랑쿠시는 돌에서 모든 살을 빼앗아 순수한 정수만 남겼으며, 자코메티는 돌을 인간의 실존적 공포 속에 세웠다. 세 사람은 같은 재료와 씨름했지만, 그 씨름이 도달한 곳은 서로 다른 우주였다.
이 세 사람의 궤적은 단순한 예술사의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공간을, 그리고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왔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로댕(1840–1917)에서 브랑쿠시(1876–1957), 자코메티(1901–1966)로 이어지는 70년 남짓한 시간은, 조각이 고전적 재현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실존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로댕: 미완성이 완성보다 더 살아있을 때
1840–1917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오귀스트 로댕에게 새 장식미술관의 청동 문을 의뢰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이 문 — 훗날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이라 불리게 될 작품 — 은 그의 생전에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37년 동안 그는 이 문에 180개가 넘는 인체를 구겨 넣고, 다시 빼내고, 변형했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이다. 원래 이 인물은 문 상단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는 단테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독으로 분리되어 세워진 이 조각은 인류 전체의 사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로댕의 혁명은 표면에서 일어났다. 그 이전의 조각가들은 인체를 매끄럽고 완벽하게 다듬었다. 그러나 로댕은 끌 자국을 남겼다. 인체가 대리석이나 청동 속에서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었다 — 생명이 물질을 뚫고 나오는 그 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였다. 완전히 완성된 표면은 오히려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이란 자연이 인간의 감정을 통해 걸러진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발견할 뿐이다.”
— 오귀스트 로댕
그는 인체를 관찰하기 위해 모델들을 스튜디오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했다. 당시 관행은 모델을 포즈 잡은 상태로 고정시켜 두는 것이었다. 로댕은 달랐다. 그는 모델이 걷고, 앉고, 손을 뻗는 순간들을 스케치하고, 그 찰나의 긴장을 조각에 담았다.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에서 여섯 명의 인물은 각자의 감정을 안고 홀로 서 있다. 절망, 체념, 결단, 공포 — 그 감정들은 근육과 자세와 손의 형태로 표현된다. 집단의 기념비가 아니라 여섯 개의 고독한 실존이 우연히 같은 운명 앞에 놓인 것이다.
거부당한 기념비
칼레 시는 1884년 로댕에게 영웅적 기념비를 주문했다. 백년전쟁 때 영국에 항복하며 도시 사람들을 구한 여섯 시민을 기리는 조각이었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조각 앞에서 위원회는 당혹해했다. 여섯 인물은 받침대 위에 높이 올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지면 높이에, 관람자와 같은 눈높이에 서 있었다. 영웅적 포즈 대신 두려움과 고뇌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위원회는 설계 변경을 요구했다. 로댕은 거부했다. “이 사람들이 영웅이라면, 그 영웅다움은 두려움을 극복한 데 있지 두려움이 없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작품은 1895년, 로댕의 원안대로 설치되었다.
로댕이 조각의 문을 연 방식은 근본적으로 인간학적이었다. 그는 신화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인간의 몸 그 자체, 그 몸이 담아내는 감정에 집중했다. “키스(Le Baiser)”, “영원한 봄”, “생각하는 사람” — 이 조각들이 세기를 넘어 이야기되는 것은 그것들이 돌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완성처럼 보이는 표면은 바로 그 생동감의 원천이었다.
브랑쿠시: 새는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다
1876–1957
1904년, 스물여덟 살의 루마니아 청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뮌헨에서 파리까지 걸어서 왔다. 보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로댕의 스튜디오에서 조수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로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나무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브랑쿠시의 작업 원칙은 간결했다.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하면, 그 사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새의 비행(Bird in Space)” 시리즈는 이 원칙의 정점이다. 날개도 없고, 부리도 없고, 깃털도 없다. 하나의 유선형 청동 기둥이 수직으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형태는 보는 사람에게 비행의 감각을 전달한다 — 새가 아니라, 비행 자체를. 브랑쿠시는 말했다. “나는 새를 만든 것이 아니다. 비행을 만든 것이다.”
“단순함은 복잡함의 해결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단순함은 예술의 목표가 아니지만, 사물의 진실한 의미에 접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순해진다.”
— 콘스탄틴 브랑쿠시
브랑쿠시는 재료 자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에도 집착했다. 대리석을 쓸 때는 대리석이 대리석답게, 나무를 쓸 때는 나무가 나무답게 보이기를 원했다. 그는 직접 돌을 쪼았다 — 당시 파리의 관행은 조각가가 모형만 만들고 장인에게 제작을 맡기는 것이었다. 브랑쿠시는 이를 거부했다. “직접 조각하는 것은 진정한 조각의 길이다. 다른 방법은 모두 산파가 하는 일이다.” 그의 스튜디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작품들을 특정 높이와 각도로 배치하여 빛이 각 조각 위에서 특정 방식으로 굴러가도록 설계했다. 오늘날 파리 퐁피두 센터에 재현된 그의 스튜디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의 작업 공간 중 하나다.
공업 제품 vs. 예술품 — 세관의 오해
1926년,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브랑쿠시의 “새의 비행” 청동 작품 한 점을 뉴욕으로 가져왔다. 미국 세관은 이것을 예술품이 아닌 공업 제품으로 분류하고 관세를 부과했다. 로댕의 조각처럼 인체를 묘사하거나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담고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것이 새라면, 우리는 더 이상 새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브랑쿠시는 소송을 제기했다.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법원은 브랑쿠시의 손을 들었다. 판결문은 이례적으로 추상 조각의 예술적 가치를 정면으로 인정했다. 그것은 단순한 세관 분쟁이 아니라 “추상이 예술일 수 있는가”에 대한 시대의 판결이었다.
브랑쿠시의 “무한 기둥(Endless Column)”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루마니아 타르구지우에 세워진 29미터 높이의 이 철제 기둥은 동일한 능형 (菱形) 단위 모듈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위아래로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착시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추모 기념물이면서 동시에 무한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구현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형태지만, 그것은 인류가 공유하는 어떤 감각 —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욕망 — 을 담고 있다.
자코메티: 보면 볼수록 작아지는 인간
1901–1966
1945년,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파리에서 제네바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간 속에 섬처럼 떠 있었다. 각자의 몸 주위로 거대한 공허가 흘렀고, 그 공허는 누구도 채울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인간을 크고 당당하게가 아니라, 공간 속에서 쪼그라드는 것으로.
자코메티의 가장 유명한 조각들 — 길고 가느다란 청동 인체상들 — 은 바로 그 경험에서 나왔다. “걷는 사람(L'Homme qui marche)”은 키가 1.8미터에 달하지만 두께는 겨우 몇 센티미터에 불과하다. 무수한 끌 자국이 표면에 남아 있다. 그 인물은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강한 바람에 맞서 버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는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에 닿지 못하는 것처럼. 자코메티는 운동이 아니라 저항을 조각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내 손이 닿기 직전에 사라진다. 아마도 나는 평생 그것을 만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계속 시도할 것이다.”
—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시작했다. 1930년대 그의 작품들은 앙드레 브르통의 격찬을 받았다. “새벽 4시의 궁전(The Palace at 4 a.m.)” 같은 작품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얇은 나무 골조와 유리로 구현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그는 초현실주의와 결별했다. 현실 — 특히 살아있는 인간의 얼굴 — 로 돌아가려 했다. 형제 디에고를 수십 년 동안 모델로 세우며 얼굴을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조각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많이 깎아냈다. 어떤 조각은 완성 전날 밤 쓰레기통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성냥갑 속의 조각
자코메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네바로 돌아가면서 9년간의 파리 작업 결과물을 가방에 담아 가려 했다.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작은 여행 가방 하나였다. 안에는 성냥갑에 들어가는 작은 조각들 몇 개가 전부였다. 9년 동안 그는 작품을 만들고 또 줄이고 줄이는 과정을 반복한 끝에, 모든 것이 그 성냥갑 크기에 도달해 있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불렀다. 그에게 조각을 줄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진실에 가까워지는 행위였다.
자코메티는 파리 몽파르나스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평생을 살았다. 바닥에는 석회 가루가 수북이 쌓였고, 반쯤 완성된 조각들이 선반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돈을 거의 벌지 못했다 —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작품들을 계속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회고전이 열리면서 그의 조각들은 세계가 주목하는 작품이 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실존주의 조각가”라 불렀다. 자코메티는 이 평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였다. 실존이란 본질에 앞선다 — 인간은 먼저 존재한 뒤에 그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자코메티의 가느다란 인체상들은 그 공허하고 취약한 실존을 청동으로 굳힌 것이었다.
같은 돌, 세 가지 우주
세 사람은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겹쳐 있었다. 로댕이 노년을 보내던 시절, 브랑쿠시는 그의 스튜디오 문을 나서고 있었다. 브랑쿠시가 “새의 비행” 소송을 진행할 때, 자코메티는 파리에서 그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이는 세대의 차이이자 세계관의 차이이기도 하다.
| 구분 | 로댕 | 브랑쿠시 | 자코메티 |
|---|---|---|---|
| 핵심 질문 | 인체는 감정을 담을 수 있는가? | 형태는 얼마나 순수해질 수 있는가? | 인간은 공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
| 표면 처리 | 거칠고 미완성적 — 생동감의 원천 | 극도로 매끈하게 연마 | 끌 자국 투성이, 거칠고 불안정 |
| 인체와의 관계 | 인체가 전부 | 인체를 넘어 본질로 | 인체를 극한으로 축소 |
| 재료관 | 재료는 감정의 도구 | 재료의 고유한 아름다움 드러내기 | 재료는 불완전한 실존의 매개 |
| 공간 이해 | 조각은 공간을 점유한다 | 조각은 공간과 대화한다 | 조각은 공간에 압도된다 |
| 완성 개념 | 미완성이 완성의 한 형태 | 완벽한 완성을 추구 |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조각가는 돌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여 그 속에 숨어있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무엇이 불필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 루돌프 아른하임, 『예술 심리학』 중
끌을 내려놓은 뒤에 남은 것
세 사람의 영향은 단순히 조각사에 그치지 않는다. 로댕이 표면에 남긴 거친 끌 자국은 “미완성이 표현의 한 방법이다”라는 인식을 예술 전반에 심었다. 브랑쿠시의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는 20세기 디자인과 건축의 언어를 형성했다. 자코메티의 실존적 취약성은 전후(戰後) 인문학 전반이 씨름했던 질문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을 조각으로 번역했다.
브랑쿠시는 말년에 파리 시민권을 취득하고 자신의 스튜디오와 작품 전체를 프랑스 국가에 기증했다. 조건이 하나 있었다 — 스튜디오를 그대로 보존할 것. 오늘날 퐁피두 센터 옆에 재건된 브랑쿠시 아틀리에는 그 유언의 실현이다. 자코메티는 1966년 스위스 쿠어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조각 중 하나다. 2010년 “걷는 사람 I”은 소더비 경매에서 1억 4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가난한 몽파르나스 스튜디오에서 성냥갑 크기로 쪼그라들었던 청동 인체는, 반세기 후 인류가 가장 비싸게 사는 것이 되었다.
로댕은 1917년 파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몇 년은 개인적으로 험난했다. 평생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고, 전쟁이 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뮤제 로댕은 오늘날 파리에서 에펠탑 다음으로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 중 하나다. 정원에 서 있는 “생각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매년 70만 명 이상이 찾아온다. 그 인물은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로댕은 살이 있는 돌을 만들었다. 브랑쿠시는 살이 없어도 살아있는 형태를 만들었다. 자코메티는 살이 깎여 사라지는 존재를 만들었다. 세 가지 돌, 세 가지 생명 — 그리고 그 사이에, 조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이 있다.
반드시 만나야 할 조각들
- 로댕: 생각하는 사람(1902) · 지옥의 문(1880–1917) · 칼레의 시민들(1895) · 키스(1882)
- 브랑쿠시: 새의 비행(1923) · 무한 기둥(1938) · 잠자는 뮤즈(1910) · 처음으로 우는 아이(1917)
- 자코메티: 걷는 사람 I(1960) · 광장(1948) · 새벽 4시의 궁전(1932) · 코(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