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그러나 20세기의 세 사진가는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세계를 복사하는 기계가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눈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가는 이렇게 선언한다 — 이것이 내가 본 세계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삶의 기하학을 포착했다. 앤설 아담스는 자연의 음계를 인화지 위에 번역했다. 다이앤 아버스는 세상이 외면한 얼굴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세 사람은 같은 도구로 전혀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세계들은 하나같이 실재했다.
브레송: 삶이 기하학이 되는 순간
1908–2004
1932년 파리, 생라자르 역 근처의 물웅덩이. 한 남자가 웅덩이를 뛰어넘으려는 찰나다. 장화 뒤꿈치가 수면을 스치기 직전, 그의 그림자가 물 위에 드리워져 있다. 포스터 속 댄서의 실루엣과 그의 자세가 정확히 겹친다. 뒤편의 사다리, 원형의 물결, 역의 기둥들이 하나의 완벽한 구도를 이룬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셔터를 눌렀다. 그 이미지는 “생라자르 역 뒤편”이 되었고, 사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남았다.
브레송은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장소에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다가, 그 순간이 왔을 때셔터를 눌렀다. 준비는 그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 평생에 걸쳐 쌓아온 눈과 직관. 그는 이것을 “결정적 순간(le moment décisif)”이라 불렀다.
“사진을 찍는 것은 형태와 내용을 동시에 하나의 독특한 순간에 잡아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알아챌 때에만 일어난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브레송은 본래 화가였다. 큐비즘과 초현실주의를 공부했고, 세잔과 마티스를 열렬히 흡수했다. 그가 카메라를 들게 된 것은 1931년,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여행에서 독일제 라이카를 손에 넣으면서였다. 작고 조용한 라이카는 거리의 삶 속으로 섞여들 수 있었다. 삼각대도, 조명도, 보조도 없이 — 혼자, 조용히, 빠르게.
검은 테이프로 감싼 카메라
브레송은 라이카의 은색 금속 부분을 검은 테이프로 덮었다. 카메라가 빛을 반사해 피사체의 시선을 끄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상태에서 세상을 보고 싶었다. 때로는 카메라를 아예 들지 않은 척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그의 거리 사진들이 그토록 자연스러운 이유다 — 찍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만년에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1975년 이후 거의 사진을 찍지 않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에게 카메라는 세잔과 마티스 이후 세상을 보는 가장 날카로운 도구였을 뿐이었는지 모른다. 도구가 달라져도 눈은 같았다. 기하학을 찾는 눈,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눈.
아담스: 빛을 악보로 쓴 사람
1902–1984
요세미티 국립공원, 1941년 11월. 앤설 아담스는 뉴멕시코 산타페 북쪽의 에르난데스 마을을 차로 지나고 있었다. 서쪽 지평선에 해가 지며 황혼빛이 교회 묘지의 흰 십자가들을 물들이고, 동쪽 하늘에 보름달이 막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는 차를 급히 세웠다. 카메라를 꺼내 삼각대를 세우고, 노출을 계산하고, 셔터를 눌렀다. 광원이 변하기까지 2분도 남지 않았다. 한 장이었다. “에르난데스의 달뜨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아담스는 이 사진의 인화본을 평생 1,300장 이상 팔았다.
아담스는 음악가가 될 뻔했다. 열두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전문 피아니스트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14살에 처음 찾은 요세미티가 그를 돌려세웠다. 이후 그는 음악의 언어로 사진을 이해했다. 네거티브 필름은 악보이고, 인화(printing)는 연주다. 같은 악보를 다른 피아니스트가 다르게 연주하듯, 같은 네거티브를 암실에서 어떻게 인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진이 된다.
“당신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 앤설 아담스
이 철학에서 탄생한 것이 “존 시스템(Zone System)”이다. 아담스는 사진의 명도를 0(순수한 검정)에서 X(순수한 흰색)까지 열한 단계로 나누었다. 촬영 전에 이미 최종 인화물의 음조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 — 이것이 “사전 시각화(previsualization)”였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인화지 위의 이미지를 보는 것. 이것은 기술이자 철학이었다.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의 세상을 보는 것.
시에라네바다의 암실
아담스는 캘리포니아 카멜에 집을 짓고, 그 안에 첨단 암실을 만들었다. 그는 하나의 네거티브에서 수십 번의 시험 인화를 거쳤다. 이 부분은 더 밝게, 저 그림자는 더 깊게 — 인화 과정에서 손으로 빛을 막거나 더해가며 최종 이미지를 조각했다. 오늘날의 포토샵 보정이 암실의 물리적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촬영한 네거티브는 4만 장이 넘지만, 그가 직접 만족스럽다고 인정한 사진은 그 중 극히 일부였다.
아담스의 사진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단순히 아름다운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논거였다. 그는 요세미티, 킹스 캐니언, 시에라네바다의 사진들을 들고 워싱턴을 찾아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사진들이 국립공원 시스템의 확장에 기여했다. 아담스에게 카메라는 보존 운동의 무기였다. 그가 포착한 요세미티의 화강암과 폭포와 별빛은 보호받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스: 외면된 얼굴을 정면으로 본 사람
1923–1971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 앞에 서면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선을 고정하기도 쉽지 않다. 교외 잔디밭에서 장난감 수류탄을 들고 인상을 찡그린 소년, 뉴저지 잔디밭의 쌍둥이 소녀들, 그늘진 공원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들. 그들은 모두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본다. 부끄러움도, 연기도 없이.
아버스는 뉴욕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급 모피 백화점을 운영했고, 그녀의 유년은 안락하고 폐쇄적이었다. 열여덟에 패션 사진가 앨런 아버스와 결혼해 상업 사진을 찍었지만, 화보 촬영의 세계는 그녀를 질식시켰다. 세상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아름다움만 찍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1950년대 말, 그녀는 독자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 보통 사람들이 지나치는 쪽을 향해 렌즈를 돌렸다.
“나는 낯선 사람을 찍는다. 그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그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 — 나는 그것이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 다이앤 아버스
아버스가 찾아간 곳들은 서커스단, 정신병원, 뉴저지의 나체주의자 캠프, 트랜스젠더 클럽, 장애인 시설이었다. 그녀의 피사체들은 사회가 시선의 바깥에 두려 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 속에서 그들은 관찰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카메라와 동등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 그 응시는 상호적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가 전복된다.
거인과의 우정
아버스는 키가 2미터 30센티미터에 달하는 에디 캐러멜이라는 남성을 몇 년에 걸쳐 촬영했다. 1970년에 찍힌 사진 속에서 그는 부모님의 거실에 서 있다 — 천장에 닿을 듯한 그의 몸이 방 전체를 압도하고, 그의 부모는 소파에 작게 앉아 있다. 이 사진의 제목은 단순하다: “부모님의 집에 있는 거인, 뉴저지, 1970”. 설명이 없다. 판단이 없다. 그러나 그 구도는 모든 것을 말한다. 아버스는 훗날 그를 “내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람 중 하나”라고 불렀다. 그는 단순히 피사체가 아니었다.
1971년, 아버스는 48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남긴 사진들은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초로 미국 사진가의 작품으로 소개되었고, 회고전 카탈로그는 출간 후 25만 부가 팔렸다. 그 반응은 복잡했다. 불편하다, 착취적이다, 위대하다 — 사람들은 같은 사진 앞에서 다른 말을 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불편함 없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같은 카메라, 세 가지 세계
세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브레송(1908–2004), 아담스(1902–1984), 아버스(1923–1971)는 20세기 중반 사진이 예술로 자리잡던 바로 그 시간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카메라로 한 일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모든 사진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어떤 것이든 사진으로 찍히는 순간, 그것은 상징적으로 죽은 것이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1977)
셔터 이후의 질문들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느냐는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카메라는 그저 세계를 복사하는 기계 아닌가. 회화처럼 예술가의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조인가 기록인가. 브레송, 아담스, 아버스는 이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했다.
브레송은 보여주었다 — 카메라를 들기까지의 평생이 그 한 장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담스는 증명했다 — 암실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이 촬영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아버스는 물었다 —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보는 행위, 그것은 폭력인가 구원인가. 이 세 질문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스마트폰으로 하루에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시대에, 오히려 더 날카롭게.
브레송은 2004년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눈을 감았다. 95세였다. 아담스는 1984년 캘리포니아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82세. 아버스는 1971년, 전시 준비를 앞두고 스스로 생을 끊었다. 48세였다. 세 사람이 남긴 이미지들은 지금도 미술관 벽에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서는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경험을 한다 — 무언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사진가의 눈이다. 찰나에 고정된, 시간이 멈춘, 그러나 아직 살아있는 눈.
셔터는 1/125초에 닫힌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영원히 열려 있다.
반드시 마주해야 할 사진들
- 브레송: 생라자르 역 뒤편(1932) · 마드리드, 아이들(1933) · 간디의 마지막 날들(1948)
- 아담스: 에르난데스의 달뜨기(1941) · 무어 웨더링(1944) · 테통 레인지와 스네이크 강(1942)
- 아버스: 부모님의 집에 있는 거인(1970) · 쌍둥이(1967) · 장난감 수류탄을 든 소년(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