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낭만주의 시인들 중에는 유독 일찍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다. 존 키츠는 스물다섯에, 퍼시 비시 셸리는 스물아홉에, 조지 고든 바이런은 서른여섯에 생을 마감했다. 셋을 합친 나이가 아흔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짧은 생 안에서 그들이 남긴 시는 이백 년이 지난 오늘도 낭송되고, 인용되고, 사랑받는다. 젊음과 불꽃과 파멸 — 이 세 단어가 낭만주의 시의 본질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낭만주의는 이성과 질서를 앞세운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다. 이성보다 감성, 규칙보다 자유, 도시보다 자연, 현실보다 상상.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1798년 『서정 담시집(Lyrical Ballads)』으로 문을 열었다면, 바이런·셸리·키츠는 그 다음 세대였다. 더 극단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빨리 타올라 재가 된 세대. 문학사는 이들을 두고 ‘제2세대 낭만주의자(Second-generation Romantics)’라 부른다.
세 시인의 생애
조지 고든 바이런 (1788–1824) · 런던 출생 · 그리스 독립전쟁 중 전사 — 낭만주의의 아이콘
퍼시 비시 셸리 (1792–1822) · 서섹스 출생 · 29세에 이탈리아 해상에서 익사 — 혁명의 시인
존 키츠 (1795–1821) · 런던 출생 · 25세에 결핵으로 타계 — 아름다움의 순교자
바이런: 스캔들과 영웅 사이에서
1788–1824
조지 고든 바이런은 1812년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 첫 두 편이 출판되자 런던 사교계는 발칵 뒤집혔다. 바이런 본인의 말로는, “나는 어느 아침 잠에서 깨어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미남에 절름발이, 귀족이면서 반항아, 사랑받고자 하면서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는 이 모순적인 청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 캐릭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캐릭터에 이름이 붙었다 — ‘바이런적 영웅(Byronic hero)’.
바이런적 영웅은 이후 수백 년 문학의 원형이 된다. 사회의 도덕 규범을 거부하지만 내면의 원칙은 지키는 인물.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지닌 채 자기 파괴적으로 살아가는 인물. 오만하지만 동시에 깊이 상처받은 인물. 에밀리 브론테의 히스클리프, 샬럿 브론테의 로체스터, 훗날 드라마 속 수많은 ‘나쁜 남자’의 원형은 모두 바이런에게서 시작되었다.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 Of cloudless climes and starry skies.”
— 바이런, ‘She Walks in Beauty’ (1814)
그의 사생활은 시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이복 누이 어거스타 리와의 불륜 의혹, 아내와의 파경, 숱한 연애 편력. 결국 영국 사교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1816년 영국을 영원히 떠났다. 스위스에서 셸리와 메리 셸리 부부를 만났다. 그해 여름, 제네바 호숫가의 빌라 디오다티에서 바이런·셸리·메리가 모여 귀신 이야기를 만들기로 한 것이 『프랑켄슈타인』 탄생의 계기가 된다. 낭만주의는 그렇게 서로를 자극하며 번져갔다.
망명 이후 이탈리아를 전전하던 바이런은 1823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한다. 돈을 모아 군함을 마련하고, 병사들의 급여를 자비로 댔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를 해방하려는 이 전쟁에 그는 낭만주의자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그러나 1824년 4월, 그리스의 미솔롱기에서 습지 열병에 걸려 서른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리스는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추모했다. 영국은 그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하는 것을 거부했다 — 도덕적 이유로. 반세기가 지난 1969년, 마침내 사원에 그의 기념판이 놓였다.
셸리: 혁명을 노래한 바람
1792–1822
퍼시 비시 셸리는 열여덟 살에 이미 무신론 팸플릿을 써서 옥스퍼드에서 퇴학당했다. 스물한 살에 처음 결혼했다가 스물두 살에 열여섯 살의 메리 고드윈(훗날 메리 셸리)과 도망쳤다. 그의 전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야 메리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공식적인 무신론자, 채식주의자, 자유연애 옹호자, 급진적 민주주의자. 당대 기준으로 셸리는 사방이 적이었고,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셸리의 시는 그 어떤 논쟁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오지만디아스(Ozymandias)’는 단 14행으로 권력의 허망함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한 시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완성도를 지닌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왕의 동상은 사막 모래에 반쯤 묻혀 있고, 그 받침대에는 “왕들의 왕이여, 나의 업적을 바라보라, 강한 자여, 그리고 절망하라!”라는 문구만 남아 있다. 동상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셸리가 쓴 이 14행시는 인류 역사 전체를 담고 있다.
“O, Wind,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 셸리, ‘Ode to the West Wind’ (1819) 마지막 행
‘서풍의 시(Ode to the West Wind)’는 셸리 문학의 정수다. 서풍은 죽어가는 것들을 날려 보내고 동시에 새 씨앗을 심는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부활이 한 바람 안에 있다. 셸리는 자신을 “주님의 하프 / 구름과 바람이 연주하는 악기”라고 불렀다. 그는 시인을 세계정신의 매체로 보았다. 시는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우주가 인간을 통해 말하는 것이었다.
1822년 7월, 셸리는 이탈리아 레리치 만에서 요트를 타고 돌아오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에 침몰했다. 스물아홉이었다. 열흘 뒤 해안에 밀려온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 검역 규정 때문에. 시신을 불태우는 자리에 바이런이 함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셸리의 심장만은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메리 셸리는 그 심장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키츠: 아름다움만이 진실이다
1795–1821
존 키츠는 셋 중 가장 짧게 살았고, 어쩌면 가장 깊이 사랑받는 시인이다. 아버지는 마구간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키츠가 열네 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약제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의학을 버리고 시를 선택했다. 당시 비평가들은 그를 냉혹하게 공격했다 — 귀족 출신도 아니고, 옥스퍼드 출신도 아닌 ‘런던 거리의 아이’가 감히 시를 쓴다고. 그러나 키츠는 흔들리지 않았다. 스물넷에 발진티푸스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결핵에 감염되었고, 스물다섯에 로마에서 눈을 감았다.
키츠의 위대함은 1819년 봄과 여름 사이 몇 달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나이팅게일에게 바치는 송시(Ode to a Nightingale)’,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시(Ode on a Grecian Urn)’, ‘우울에게(Ode on Melancholy)’, ‘가을에(To Autumn)’를 썼다.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이토록 짧은 기간 동안 이토록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쏟아낸 사례는 드물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 that is all /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 키츠, ‘Ode on a Grecian Urn’ (1819) 마지막 연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시’는 2천 년 전 그리스 도자기에 새겨진 장면들을 바라보며 쓰였다. 항아리 위의 청년은 영원히 연인을 쫓고 있고, 연인은 영원히 도망친다. 키스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썩지 않는다. 키츠는 이 역설 안에서 예술의 본질을 발견했다. 현실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만, 예술 속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 영원한 아름다움이 곧 진실이다. “아름다움은 곧 진실이요, 진실은 곧 아름다움.” — 이 두 행은 영문학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중 하나가 되었다.
키츠는 편지를 자주 썼고, 그 편지들이 또 하나의 중요한 문학적 유산이 되었다. 그 안에서 그는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의 개념을 정의했다.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서도 사실과 이성을 향해 성급히 달려가지 않고 그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위대한 예술가의 조건이라고 그는 보았다. 섣불리 답을 찾지 않고, 모호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오래 머무는 것.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도달한 이 통찰은 이후 예술론과 철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세 개의 불꽃, 하나의 낭만주의
바이런, 셸리, 키츠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바이런은 행동하는 시인이었다. 그에게 시는 삶과 분리된 예술이 아니라 삶 자체의 연장이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뛰어든 것도 바로 그 연장선이었다. 셸리는 혁명하는 시인이었다. 그에게 시는 세계를 바꾸는 도구였다. 그는 진지하게 시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시인은 세계의 공인받지 못한 입법자들이다”라고 썼다. 키츠는아름다움을 순례하는 시인이었다. 그에게는 정치도 혁명도 아닌, 오직 아름다움의 완전한 포착이 목적이었다.
바이런
행동하는 낭만
삶 자체가 시였고, 시 자체가 삶이었다. 스캔들과 망명과 전쟁까지 —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다.
셸리
혁명하는 상상
시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의 힘과 인간의 자유를 하나로 묶은 풍경시의 거장.
키츠
아름다움의 순교
25년의 생애를 아름다움의 완전한 포착에 바쳤다. 부정적 능력과 감각의 시학으로 서정시의 정점에 섰다.
세 사람의 관계는 실제로도 교차했다. 바이런과 셸리는 1816년 스위스에서 처음 만난 이후 가까운 친구였다. 셸리는 바이런의 재능을 깊이 존경했고, 바이런은 셸리의 급진성에 매료되었다. 셸리가 죽었을 때 화장식을 주관한 것도 바이런이었다. 키츠는 셸리와 면식이 있었지만 그리 가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셸리는 키츠의 건강을 염려해 이탈리아로 와서 쉬라고 권유했다. 키츠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셸리는 이듬해 키츠를 추모하는 비가 ‘아도나이스(Adonais)’를 썼다. 그리고 석 달 뒤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
바이런은 행동으로 시를 썼고, 셸리는 바람으로 시를 썼으며, 키츠는 아름다움 그 자체로 시를 썼다. 세 사람이 합쳐지면 낭만주의라는 말의 완전한 정의가 된다.
— 세 시인의 교차점
젊음이 남긴 것
세 시인의 요절은 낭만주의 시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낭만주의의 완성이었다. 낭만주의는 강렬한 감정, 자유, 자연, 이상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 이상이 가장 찬란하게 타오르는 순간에 생을 마친 이 세 시인은 낭만주의의 살아 있는 상징이 되었다. 만약 바이런이 일흔까지 살아 어느 영국 시골 저택에서 회고록을 쓰고 있었다면, ‘바이런적 영웅’이라는 개념은 지금처럼 강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영향은 이후 영문학 전체에 스며들었다. 테니슨, 브라우닝, 하디, 예이츠, 오든 — 모두 어떤 형태로든 이 세 시인에게 빚을 졌다. 영미권을 넘어서도 마찬가지다. 푸시킨은 바이런을 읽으며 자신의 시 세계를 열었고, 하이네는 셸리와 키츠의 서정성에서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들어서도 이들의 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키츠의 “아름다움은 진실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로 논의된다. 셸리의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지금도 세계 어딘가의 시위 현장에서 낭송된다.
키츠는 로마의 스페인 광장 옆 작은 아파트에서 죽었다. 그 방은 지금 박물관이 되었다. 셸리의 묘는 로마의 비가톨릭 묘지에 있다. 그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그에게서 심장을 빼앗기지 않은 자 없었다 (Cor Cordium, Heart of Hearts)’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바이런의 기념비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다 — 그가 죽은 지 145년 만에. 세 사람 모두, 마지막 자리를 얻기까지 오래 걸렸다. 하지만 시는 기다렸고, 결국 살아남았다.
대표작
- 조지 고든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12–18), 돈 주앙(1819–24), 맨프레드(1817), She Walks in Beauty(1814), 그녀의 걸음은 아름다움처럼
- 퍼시 비시 셸리: 오지만디아스(1818), 서풍의 시(1819), 프로메테우스 언바운드(1820), 종달새에게(1820), 아도나이스(1821)
- 존 키츠: 나이팅게일에게 바치는 송시(1819),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시(1819), 가을에(1819), 라 벨 담 상 메르시(1819), 하이피리온(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