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사에는 대성당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기초를 쌓았다 — 90편이 넘는 소설로 프랑스 사회 전체를 벽돌 하나하나 올려 축조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그 위에 조각을 새겼다 — 완벽한 한 문장을 위해 일주일을 바칠 수 있었던 사람. 마르셀 프루스트는 첨탑을 세웠다 — 3,000페이지짜리 소설 한 편으로 기억과 시간의 끝없는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세 사람은 한 번도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그들이 쌓은 것은 하나의 건축물이다.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르는 그 형식의 대성당.
프랑스 소설은 19세기에 가장 높이 솟아올랐다. 그 이전까지 소설은 오락이었고, 연재물이었고, 사교계의 잡담거리였다. 그러나 발자크가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을 구상하면서부터 소설은 달라졌다 — 인간 사회를 총체적으로 해부하는 학문적 기획이 되었다. 플로베르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소설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프루스트는 소설이 철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세 단계가 겹쳐진 곳에 프랑스 문학의 정점이 있다.
세 작가의 생애
오노레 드 발자크 (1799–1850) · 투르 출생 · 20년간 커피를 마시며 90편 이상 집필 — 소설적 사실주의의 창시자
귀스타브 플로베르 (1821–1880) · 루앙 출생 · ‘마담 보바리’ 한 편에 5년 · 음란죄로 기소 — 문장의 완벽주의자
마르셀 프루스트 (1871–1922) · 파리 출생 · 코르크 방에서 3,000페이지 집필 — 기억과 시간의 탐험가
발자크: 세계를 목록으로 만든 사람
1799–1850
발자크가 커피를 하루 50잔씩 마셨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런데 이건 과장이 아니다. 그는 새벽 1시에 잠들어 새벽 6시에 일어나 — 또는 저녁 6시에 잠들어 자정에 일어나 — 아침까지 열두 시간을 내리 썼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면 가명으로 숨었고, 숨어서 또 썼다. 정력적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만들어낸 것이 ‘인간희극’이다 — 2,000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오가는 90편 이상의 소설과 단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프랑스 사회의 지도.
발자크의 천재성은 한 인물이 여러 작품에 걸쳐 등장하는 방식에서 먼저 드러난다. 고리오 영감은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의 주인공이지만, 다른 소설에서는 조연으로 스쳐 지나간다. 야심 찬 청년 라스티냐크는 수십 편에 걸쳐 성장한다. 이 기법 — ‘인물 재등장 (personnages reparaissants)’ — 은 발자크가 발명한 것이다. 소설들이 서로를 참조하고 연결되면서, ‘인간희극’ 전체가 하나의 세계로 살아 숨쉬게 된다. 독자는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
“뒤를 돌아보며 파리를 바라본 라스티냐크는 상류사회를 향해 외쳤다. ‘이제 우리 둘이 붙어보자!’”
— 발자크, ‘고리오 영감’ (1835) 마지막 장면
발자크는 소설이 과학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동물학자 뷔퐁이 동물의 종(種)을 분류하듯, 자신은 사회적 종을 분류하겠다고 선언했다. 귀족, 부르주아, 고리대금업자, 몰락한 예술가, 야심찬 지방 청년 — 각각의 ‘종’은 고유한 습성을 가지고, 돈과 권력과 사랑이라는 힘에 반응한다. 그 반응의 패턴을 소설로 기록하는 것이 발자크의 프로젝트였다. 사실주의 소설의 시작은 이 거대한 야망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자크의 사생활은 소설만큼이나 극적이었다. 평생 빚에 시달렸고, 인쇄업에 뛰어들었다가 파산했으며, 사랑하는 여인 한스카 백작 부인에게 18년 동안 편지를 쓴 끝에 마침내 결혼했다 — 결혼 직후 다섯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쉰한 살이었다. 잠을 너무 적게 자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심장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빅토르 위고는 장례식에서 말했다. “그는 대가(大家)들의 반열에 속한다.”
플로베르: 완벽한 문장이 존재한다는 믿음
1821–1880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 한 편을 쓰는 데 5년이 걸렸다. 발자크가 같은 기간 동안 열 편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속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정확한 단어(le mot juste)’ — 딱 맞는 그 단어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밤 소리 내어 자신이 쓴 문장을 읽었다. 귀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고쳤다. 리듬이 맞지 않으면 다시 썼다. 완벽하게 들릴 때까지. 이 의식을 ‘요정의 외침(gueuloir)’이라 불렀다.
‘마담 보바리’는 1857년 출판되자마자 음란죄로 기소되었다. 지방 의사의 아내 엠마 보바리가 낭만적 환상을 좇아 두 번의 불륜을 저지르고 파멸한다는 이야기가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플로베르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소설은 즉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플로베르 자신은 ‘보바리즘(bovarysme)’ — 현실 대신 낭만적 환상 속에서 사는 병 — 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정확하게 쓰고 싶었을 뿐이었다.
“인간의 언어는 마치 금이 간 냄비 같아서, 그 위에서 곰들을 춤추게 할 수는 있지만, 별들을 감동시키는 멜로디를 연주할 수는 없다.”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1857)
플로베르는 소설 속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엠마 보바리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고, 그녀의 남편 샤를의 둔함을 조롱하지 않는다. 단지 보여줄 뿐이다. 이 냉정한 거리 두기는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다. 소설가는 관찰자여야 하지 판사여서는 안 된다는 플로베르의 철학은 이후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이어졌다. 현대 소설의 문법을 플로베르가 만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로베르는 평생 루앙 근처의 크루아세 저택에서 살았다. 파리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꺼렸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이 지금도 문학사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는 조르주 상드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언제나 내가 쓰는 것에 의해 살아왔소. 내가 써온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지탱해주지 않았소.”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871–1922
마르셀 프루스트는 코르크로 벽을 두른 방에서 소설을 썼다. 천식과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 바깥 소음도, 꽃가루도, 심지어 빛도 차단하고 싶었다. 밤에 글을 쓰고 낮에 잠들었으며, 외출할 때면 모피 코트를 입었다. 그렇게 15년 동안 방에서 써낸 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다.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긴 소설. 7권, 약 3,000페이지, 150만 단어. 하나의 소설이 하나의 삶을 모두 담았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비스킷이다. 화자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를 입에 넣는 순간, 어린 시절 콩브레의 기억이 통째로 밀려온다 — 냄새, 빛깔, 소리까지 모두. 프루스트는 이것을 ‘비자발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라 불렀다. 의식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달리, 감각이 촉발하는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그대로 되살린다. 그 순간 시간은 사라진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된다. 프루스트는 이 경험에 소설 전체를 걸었다.
“우리의 과거를 찾아야 할 것은 지성 안이 아니다. 냄새와 맛 속에, 더 연약하지만 더 생명력 있고, 더 비물질적이고, 더 지속되고 더 충실한 것들 속에, 거대한 기억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 프루스트, ‘스완네 집 쪽으로’ (1913)
프루스트의 문장은 길기로 악명 높다. 한 문장이 페이지를 넘어가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산만함이 아니다 — 생각이 펼쳐지는 방식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깔끔하게 주어-동사-목적어로 떨어지지 않는다. 연상이 연상을 부르고, 기억이 기억을 끌어당기며, 생각은 구불구불 흘러간다. 프루스트의 긴 문장은 의식의 흐름 그 자체를 흉내 낸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1913년 첫 권 출판될 때까지 사회적으로는 한량이었다. 파리 사교계를 누비고, 화려한 디너 파티에 참석하고,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관찰이었다. 그는 사교계의 허영, 사랑의 질투, 예술가의 소명, 죽음의 그림자를 노트에 쌓아두고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그것을 3,000페이지로 풀어낸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1922년 쉰한 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두 권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편집자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해 출판했다. 소설은 그의 죽음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세 건축가, 하나의 대성당
발자크, 플로베르, 프루스트는 같은 목표를 향했지만 전혀 다른 방법론을 가졌다. 발자크에게 소설은 사회의 총체적 재현이었다. 그는 세상을 더 넓게 담으려 했다 — 빠짐없이, 치밀하게, 분류학적으로. 플로베르에게 소설은 언어의 완벽한 예술이었다. 그는 소설을 더 정밀하게 만들려 했다 — 모든 여분을 걷어내고, 남은 것이 순수한 진실이 되도록. 프루스트에게 소설은시간의 철학적 탐구였다. 그는 소설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 의식의 층위 아래, 감각의 뿌리 아래, 기억이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찾아서.
발자크
사회의 기록자
소설은 사회 전체를 담는 그릇이어야 했다. 2,000명의 인물, 90편의 소설 — 그 총합이 19세기 프랑스 그 자체였다.
플로베르
언어의 조각가
딱 맞는 단어는 반드시 존재한다. 찾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그 집착이 현대 소설 문체의 기준을 만들었다.
프루스트
시간의 탐험가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냄새 하나로 되살아난다. 3,000페이지가 그 순간 하나를 향해 달린다.
흥미롭게도 세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플로베르는 발자크를 존경하면서도 비판했다 — “발자크는 훌륭하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쓸 줄 알았다면 어떤 작가가 되었을까.” 가혹한 평이지만 그것은 플로베르가 발자크 위에 서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프루스트는 플로베르의 문체에 깊이 경도되었고, 1920년에 “플로베르의 문체에 대하여”라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플로베르가 발명한 ‘불완전과거 시제의 혁명’ — 과거를 현재처럼 생생하게 만드는 시제 사용 — 을 분석하며, 그것이 소설 언어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고 썼다.
발자크가 세계를 담으려 했다면, 플로베르는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려 했고, 프루스트는 세계를 경험하는 의식 그 자체를 포착하려 했다. 소설이라는 형식은 이 세 번의 시도를 거치며 비로소 완성되었다.
— 프랑스 소설의 세 기둥
대성당은 완성되었는가
발자크, 플로베르, 프루스트 이후로도 프랑스 소설은 계속되었다. 카뮈,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누보로망의 알랭 로브그리예까지. 그러나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그 다음 세대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을 부수고, 무엇을 계승했겠는가. 발자크 없이 졸라의 자연주의가 없었고, 플로베르 없이 헤밍웨이의 절제가 없었으며, 프루스트 없이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이 없었다. 프랑스 소설의 세 거장은 국경을 넘어 소설이라는 형식 전체의 유전자가 되었다.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다. 세 사람 모두 소설의 형식 자체를 새로 발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발자크는 소설이 사회 전체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플로베르는 소설이 개인의 심리를 냉정하게 해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루스트는 소설이 시간과 기억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수 있음을 실증했다. 이 세 번의 확장이 겹쳐지면서 소설은 비로소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다.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는 발자크와 프루스트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플로베르는 루앙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 그가 평생 살았던 크루아세 집 근처에. 세 사람이 살아서 한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소설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들은 언제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대표작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1835), 골짜기의 백합(1836), 사촌 베트(1846), 외제니 그랑데(1833), 잃어버린 환상(1837–43) — 인간희극 총 90편
-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1857), 감정 교육(1869), 살람보(1862), 성 앙투안의 유혹(1874), 부바르와 페퀴셰(미완, 1881)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스완네 집 쪽으로(191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1919), 게르망트 쪽(1920–21), 소돔과 고모라(1921–22), 갇힌 여인(1923), 사라진 알베르틴(1925), 되찾은 시간(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