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은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라고 한다. 음역도, 표현의 폭도, 그리고 연주자의 숨결이 소리에 고스란히 얹히는 방식도. 그렇기에 같은 악기를 켜도 연주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말을 거는 것처럼 들린다. 야샤 하이페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예후디 메뉴인 — 20세기가 낳은 이 세 거장은 같은 악기로 서로 전혀 다른 세계를 이야기했다. 완벽함의 극한, 영혼의 온기, 그리고 정신의 깊이.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우러져 20세기 바이올린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세 사람의 생애는 서로 얽혀 있다. 하이페츠가 이미 20대에 전설이 되었을 때 오이스트라흐는 소련의 지방 콩쿠르를 쓸고 다니던 청년이었고, 메뉴인은 세 살배기 미국 소년으로 바이올린에 손을 뻗고 있었다. 이들은 같은 무대에 선 적이 거의 없었다. 냉전이 세계를 갈라놓았고, 각자의 명성이 각자의 세계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알았다. 하이페츠는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를 듣고 “저 사람은 나를 걱정스럽게 만드는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기계가 아닌 신 — 야샤 하이페츠
1917년 10월, 열여섯 살의 야샤 하이페츠가 카네기홀 무대에 처음 섰다. 관객석에는 당대의 거장 레오폴드 아우어도, 미샤 엘만도 앉아 있었다. 연주가 끝난 뒤 엘만이 땀을 닦으며 아우어에게 속삭였다. “홀이 너무 더운 것 같지 않습니까?” 아우어가 대답했다.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전혀.” 이 일화가 전설로 남을 만큼, 하이페츠의 등장은 당시 음악계에 충격이었다.
“하느님은 나에게 재능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매일 연습한다. 만약 내가 하루를 쉬면 나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을 쉬면 청중이 안다.”
— 야샤 하이페츠
하이페츠의 연주에는 어떤 음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음정, 리듬, 음색 — 모든 것이 수학적으로 정확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완벽한 기계’라고 부르는 것은 틀렸다. 그의 완벽함은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거의 신비로운 성격을 띠었다. 1939년에 녹음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지금도 이 곡의 기준 음반으로 거론된다. 마지막 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폭발하는 그 순간, 활이 현을 긁어내는 그 소리는 단순히 ‘잘 연주된 음악’이 아니다. 무언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의 끝에 서 있는 느낌이다.
하이페츠는 무대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굴은 무표정했고, 몸동작은 최소화했으며, 청중에게 한 번도 미소 짓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냉혹한 완벽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녹음을 들어보면 그 판단이 얼마나 표면적인지 알 수 있다. 하이페츠의 현에서 나오는 소리에는 명백한 감정이 있다 — 단지 그것이 넘치거나 흘러내리지 않을 뿐이다. 절제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이었다.
황금 활의 온기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소리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종종 같은 말을 한다. “따뜻하다.” 하이페츠의 소리가 찬란하게 빛난다면, 오이스트라흐의 소리는 난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온기를 전한다. 1908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태어난 그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 시스템 안에서 자랐고, 그 안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 나는 소련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바이올리니스트다. 내 악기는 인류에게 속해 있다.”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1937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 콩쿠르. 오이스트라흐는 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진짜 충격은 1955년 냉전의 절정기에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을 때였다.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카네기홀에 섰다 — 그것 자체가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이스트라흐가 첫 음을 내자 청중은 정치를 잊었다. 공연이 끝난 뒤 뉴욕 타임스는 “하이페츠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썼다.
오이스트라흐는 특히 브람스와 베토벤, 그리고 소련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빛났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연주 금지 처분을 받았다 해제된 이 협주곡을 오이스트라흐가 초연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었다. 두 예술가가 국가 권력에 맞서 지켜낸 무언가의 발화점이었다.
그는 1974년 암스테르담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지휘자로서의 경력도 함께 꽃피우던 시기였다. 오이스트라흐가 남긴 녹음들에는 지금도 그의 활이 현을 어루만지는 방식이 담겨 있다 — ‘긁는다’가 아니라 ‘어루만진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소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게 하는 방식. 그것이 오이스트라흐의 비밀이었다.
신동에서 현자로 — 예후디 메뉴인
예후디 메뉴인의 이야기는 기적으로 시작한다. 일곱 살에 샌프란시스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열한 살에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 앞에서 연주했다. 공연이 끝난 뒤 아인슈타인이 무대로 올라와 메뉴인을 껴안으며 말했다. “이제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신동. 이 단어는 메뉴인의 평생을 따라다녔고, 그는 평생 이 단어에서 벗어나려 했다.
“음악은 나에게 언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배운 언어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던 언어다. 문제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 평생이 걸린다는 것이다.”
— 예후디 메뉴인
그러나 메뉴인의 삶에는 하이페츠나 오이스트라흐와 다른 굴곡이 있었다. 20대에 갑작스러운 기술적 위기가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느낌으로’ 연주하던 그는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이 사용하는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해야 했다. 이 위기는 그에게 인도 철학과 요가를 소개했다. 메뉴인은 바이올린을 다시 배우는 과정에서 몸과 음악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에 도달했다.
그의 음악 세계는 서양 고전음악을 훌쩍 넘어섰다. 인도의 라비 샨카르와 함께 동서양 음악의 융합을 시도했고, 집시 재즈의 창시자 장고 라인하르트와 함께 앨범을 녹음했으며, 전통 음악 보존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가 설립한 메뉴인 학교는 지금도 런던 교외에서 영재 음악 교육의 모델로 운영된다. 그리고 그는 유네스코 친선대사로서 분쟁 지역에 음악을 가져갔다. 메뉴인에게 바이올린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인류를 연결하는 도구였다.
같은 악기, 세 개의 우주
하이페츠
완벽
하이페츠의 완벽함은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오이스트라흐
온기
오이스트라흐의 소리에는 인간의 온도가 있었다. 기술이 감정을 섬기는 방식의 표본.
메뉴인
탐구
메뉴인은 바이올린을 넘어 음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질문이 그를 현자로 만들었다.
이 세 사람이 남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완벽한 기술이 먼저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표현이 먼저인가? 하이페츠는 전자를 밀어붙여 후자에 도달했고, 오이스트라흐는 후자에서 출발하여 전자에 이르렀으며, 메뉴인은 그 질문 자체를 해체하고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세 가지 답이 모두 옳다. 그리고 세 가지 답 중 어느 하나만 옳다면 20세기 바이올린 음악의 황금시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 한 자루는 수백 억 원이다. 그러나 그 몸통을 울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연주자다. 하이페츠가 활을 들면 현이 두려움 없이 복종했다. 오이스트라흐가 활을 들면 현이 노래하고 싶어 했다. 메뉴인이 활을 들면 현이 무언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같은 악기, 같은 현 — 그러나 거기서 울려 퍼진 것은 완전히 다른 세 개의 인간이었다. 바이올린이 목소리와 닮은 이유가 여기 있다. 악기는 결국 그것을 켜는 사람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처음 듣는다면 — 추천 감상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1935/1959)
마지막 악장에서 활의 속도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1960, 클렘페러 지휘)
느린 2악장에서 오이스트라흐의 온기가 절정에 이른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1934/1975)
소년과 노인의 바흐가 어떻게 다른지 두 녹음을 비교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