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음악(polyphony)은 여러 개의 독립된 선율이 동시에 울리는 음악이다. 한 성부가 위로 솟구칠 때 다른 성부는 아래로 내려가고, 또 다른 성부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길을 간다. 그 결과는 단순한 화음이 아니다. 목소리들이 서로 대화하고, 반박하고, 결국 하나의 거대한 짜임새로 수렴하는 살아있는 구조다. 르네상스 시대, 이 기술은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세 사람이 있었다.
조반니 팔레스트리나, 조스캥 데 프레, 윌리엄 뷔르드.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궁정과 성당에서 살았다.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는 교황청의 품 안에서 신을 위한 음악을 빚었고, 플랑드르의 조스캥은 유럽 전역을 떠돌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언어를 소리에 옮겼다. 영국의 뷔르드는 신교 왕국에서 구교 신자로 살면서, 금지된 미사를 악보에 새겼다. 세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은 국적도, 종교적 입장도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목소리를 하나의 숨결로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 너머에 있는 어떤 신념이었다.
조반니 팔레스트리나
c.1525–1594
정화
트리엔트 공의회가 다성음악을 금지하려 할 때, 그의 음악이 다성음악을 구해냈다는 전설이 있다. 명료하고 매끄러운 대위법의 전형.
조스캥 데 프레
c.1450–1521
표현
루터가 '음표의 주인'이라 불렀다. 텍스트의 의미가 음악의 형태를 결정하는 '문자 그림법'의 선구자.
윌리엄 뷔르드
1543–1623
저항
신교 잉글랜드에서 구교 미사를 작곡했다. 박해 속에서도 건반음악과 성악을 넘나들며 르네상스 영국의 가장 완성된 목소리가 되었다.
음표의 주인 — 조스캥 데 프레
조스캥 데 프레는 르네상스 유럽의 슈퍼스타였다. 그는 밀라노, 로마, 페라라, 파리를 돌아다녔다. 교황 시스투스 4세의 예배당에서 일했고, 에스테 가문의 궁정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가 새 곡을 발표하면 악보 필사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조스캥은 음표의 주인이다. 다른 작곡가들은 음표에게 부림을 당한다.”
조스캥이 이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달랐던 것은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중세의 작곡가들은 가사를 하나의 소재로 다루었다. 가사 위에 음악을 얹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스캥은 텍스트의 의미가 음악의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울었다”라는 가사에서 선율은 아래로 흘러내린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대목에서 목소리는 상행한다. 이 기법을 ‘문자 그림법(word painting)’이라 한다. 오늘날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조스캥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의 목적은 텍스트를 섬기는 것이다. 텍스트가 음악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 조스캥 데 프레의 작업 원칙으로 전해지는 말
그의 대표작인 《애가》 — 구약성경 예레미야의 슬픔을 담은 모테트 — 를 들으면 이 원칙이 얼마나 강력한지 느껴진다. 예루살렘의 함락을 노래하는 성부들은 겹쳐지면서도 결코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각 목소리가 독립적으로 슬프고, 함께 더 크게 슬프다. 이것이 대위법의 마법이다.
조스캥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에스테 공국의 에르콜레 1세는 궁정 악장 자리를 놓고 두 작곡가 사이에서 고민했다. 한 명은 하인리히 이자크(조스캥보다 더 빠르고 성실한 작곡가), 다른 한 명은 조스캥이었다. 신하 하나가 이자크를 추천하며 조스캥은 “제멋대로이고, 자기 마음이 내킬 때만 작곡한다”고 했다. 에르콜레는 조스캥을 선택했다. 천재의 변덕을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스캥은 그 뒤 1년간 에르콜레를 위한 미사곡을 썼고, 그것이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가 되었다.
다성음악을 구한 자 — 조반니 팔레스트리나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종교개혁에 맞서 교회의 규율을 정비하는 자리였다. 음악도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성당의 다성음악은 너무 복잡해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비판이 있었다. 보수적인 추기경들은 요구했다. 미사 음악은 단순해야 한다. 가사가 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성음악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
이 위기에서 다성음악을 구한 것이 팔레스트리나라는 전설이 있다. 그가 교황 마르첼로 2세를 위해 쓴 《교황 마르첼로 미사》가 공의회의 기준을 만족시키며 다성음악이 계속 허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설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하나의 사실은 분명하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당시 논쟁의 정확한 중간 지점을 찾아냈다. 여러 목소리가 얽히면서도, 가사를 충분히 명료하게 전달한다. 복잡함과 명료함 사이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모든 재능을 오직 그분의 경배를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
— 조반니 팔레스트리나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은 ‘매끄럽다’는 말이 어울린다. 조스캥의 음악이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선율을 극적으로 오르내린다면, 팔레스트리나의 선율은 물처럼 흐른다. 큰 도약 없이 순차적으로 움직이고, 불협화음은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부드럽게 해소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특별히 강렬한 순간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의도다. 팔레스트리나는 신자의 기도를 방해하는 음악이 아니라, 기도를 받쳐주는 음악을 원했다.
그의 생애 자체도 음악만큼이나 질서정연했다. 로마 근교 팔레스트리나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로마에서 보냈다. 시스티나 성당과 산 피에트로 바실리카에서 일했고, 104곡의 미사와 300곡이 넘는 모테트를 남겼다. 두 번의 흑사병으로 아내와 두 아들을 잃었고, 사제가 되려다 재혼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상실이 그의 음악에 비탄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팔레스트리나의 슬픔은 투명하고 고요했다.
금지된 미사를 작곡한 자 — 윌리엄 뷔르드
윌리엄 뷔르드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악보를 쓴 작곡가 중 하나였다. 그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에서 살았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반역에 준하는 범죄였고, 사제를 숨겨준 것만으로도 처형될 수 있었다. 뷔르드는 그 시대에 세 편의 라틴어 미사를 작곡했다. 표지도 없이, 작곡가 이름도 없이 인쇄된 그 악보들은 비밀 예배를 드리는 가톨릭 가정에서 몰래 사용되었다.
이 사실이 더 놀라운 것은, 뷔르드가 동시에 왕실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는 점이다. 그는 여왕을 위해 신교 음악을 연주했고, 지하에서는 구교 미사를 작곡했다. 그는 여러 차례 가톨릭 신앙을 이유로 고발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보호했다. 뷔르드의 음악적 천재성이 그를 살렸다. 혹은 왕실이 그의 재능을 너무 아꼈거나.
“경건한 마음으로 신에게 바쳐지는 노래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든다. 그리하여 게으른 자들의 마음도 깨어나게 한다.”
— 윌리엄 뷔르드, 《칸티오네스 사크라이》 서문
뷔르드의 진정한 위대함은 폭이다. 그는 성악 다성음악에서 출발했지만, 건반 음악의 언어를 거의 홀로 개척했다. 류트 음악과 마드리갈, 앤섬까지. 그의 건반 작품들이 담긴 《피츠윌리엄 버지널 북》에는 변주곡, 춤곡, 가요 편곡이 가득하다. 이 음악들은 중세와 근대 사이 어딘가에 있다. 대위법의 엄격함과 영국 전통 선율의 자유로운 정서가 공존한다.
팔레스트리나와 조스캥이 성당과 궁정의 음악가였다면, 뷔르드는 더 넓은 세계를 보았다. 그는 음악이 예배당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거실의 버지널 앞에서도, 마드리갈을 같이 부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신념이 그를 르네상스 음악의 가장 완성된 목소리로 만들었다.
세 개의 실이 짜는 하나의 태피스트리
세 사람의 음악은 전혀 다르게 들린다. 조스캥을 들으면 텍스트가 음악을 통해 말을 거는 느낌이다. 팔레스트리나를 들으면 공간 자체가 신성해지는 것 같다. 뷔르드를 들으면 엄격함과 서정성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런데 이 셋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 각 성부가 자신의 독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체를 이룬다는 것.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이상은 결국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소리로 그린 것인지 모른다.
이 세 작곡가 사이에는 직접적인 교류의 기록이 거의 없다. 조스캥은 뷔르드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팔레스트리나와 뷔르드는 동시대인이었지만 로마와 런던 사이의 거리는 멀었고, 종교적으로는 적대적 진영에 있었다. 그러나 뷔르드는 팔레스트리나의 악보를 공부했고, 조스캥은 팔레스트리나의 스승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악보는 경계를 넘었다. 위험한 시대에도 음악은 이동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시대에 이미 고전으로 여겨졌다. 조스캥이 살아있을 때 그의 이름은 권위였다. 팔레스트리나의 이름을 건 악보는 더 비싸게 팔렸다. 뷔르드는 ‘영국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죽었다. 르네상스는 자신이 만든 황금기를 이미 알아보았다.
목소리들은 지금도 울린다
르네상스 다성음악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다. 선율이 하나가 아니어서 어디에 귀를 두어야 할지 모른다. 리듬이 지금 음악처럼 강박을 두드리지 않아서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면 무언가가 달라진다. 여러 성부가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한 성부가 올라가면서 다른 성부가 내려오고, 그 교차점에서 이상하게 아름다운 화음이 생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음악은 계속된다. 팔레스트리나의 미사는 사라지지 않고, 조스캥의 애가는 끝나지 않으며, 뷔르드의 버지널 음악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거실에서 울릴 수 있다.
오늘 밤, 헤드폰을 끼고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로 미사》를 들어보라. 처음 5분만 버티면, 성당 천장이 그 음악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처음 듣는다면 — 추천 감상
《애가》 중 〈Incipit Lamentatio〉
4성부의 슬픔이 교차하는 방식에 귀를 맞춰보라. 텍스트의 뜻이 소리로 보인다.
《교황 마르첼로 미사》 〈Kyrie〉
6성부가 얽히면서도 가사가 또렷이 들린다. 조화가 무엇인지 이 8분이 알려준다.
《4성부 미사》 또는 《피츠윌리엄 버지널 북》 중 변주곡
미사와 건반 음악을 나란히 들어보라. 한 사람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