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는 인간의 목소리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음역 — 남성 바리톤의 낮은 탄식과 가장 닮아 있다. 그 낮고 풍요로운 울림 속에는 어딘가 고독이 깃들어 있다. 파블로 카잘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재클린 뒤프레. 20세기를 수놓은 이 세 첼리스트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을 살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고독을 첼로의 현 위에 올려놓았다. 침묵으로 저항한 자, 추방 속에서도 활을 놓지 않은 자, 그리고 28세에 악기를 빼앗긴 자. 세 개의 고독은 모두 달랐지만, 첼로는 그것들을 같은 언어로 노래했다.
세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조건 위에 놓여 있었다. 카잘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바르셀로나의 고물 악보 가게에서 발견했을 때 — 1889년, 그의 나이 열세 살 — 로스트로포비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뒤프레의 어머니는 어린 소녀였다. 그러나 세 사람은 모두 첼로라는 하나의 악기 앞에서 같은 질문에 부딪혔다. 음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인가, 아니면 그것을 켜는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인가?
침묵으로 저항한 고독 — 파블로 카잘스
1889년, 열세 살의 파블로 카잘스는 아버지와 함께 바르셀로나의 허름한 악보 가게를 둘러보다 낡고 구겨진 악보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여섯 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당시 음악계에서 이 곡들은 연습용 교재쯤으로 여겨졌다. 카잘스는 그 악보를 12년 동안 매일 연습하고 분석한 끝에 1901년 처음 공개 연주했다. 그가 없었다면 인류는 바흐의 이 불멸의 유산을 영원히 ‘연습곡’으로만 알았을지 모른다.
“새들은 노래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가 듣는지 묻지 않는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묻고 있다 — 과연 양심을 닫고 노래할 수 있는가?”
— 파블로 카잘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프란코가 권력을 잡자 카잘스는 자신의 고향 카탈루냐를 등지고 프랑스 국경 마을 프라드에 정착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프란코 정권을 인정하는 나라에서는 연주하지 않겠다.” 이것은 개인적인 보이콧이 아니라 예술가가 역사 앞에 선 방식이었다.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가 무대를 떠난 것이다. 13년 동안. 그의 나이 일흔이 될 때까지.
그러나 역사가 가장 기억하는 장면은 1971년 10월, 그의 나이 아흔다섯에 찾아왔다. 유엔 평화 메달을 수상한 카잘스는 뉴욕 유엔 총회에 섰다. 그는 연설 대신 첼로를 들었다. 연주한 곡은 카탈루냐 민요 ‘새의 노래(El Cant dels Ocells)’. 짧고 단순하지만 그 선율이 총회장에 울려 퍼지는 동안 대표들 상당수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카잘스는 연주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탈루냐 사람입니다. 카탈루냐는 지금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원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카잘스는 97세까지 살았다. 그의 고독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세상이 틀렸을 때 거기서 물러서는 것, 그러나 악기 앞에서만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카잘스의 방식이었다.
추방당한 고독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1970년 가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소련 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자신의 모스크바 교외 별장에 숨겼다.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직후 소련 체제의 타깃이 된 상태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4년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다. 모든 해외 연주 허가가 취소되고, 음반 녹음이 금지되고, 방송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나는 자유를 연주했다. 쇼스타코비치가 나에게 그의 협주곡을 바쳤을 때, 그것은 악보가 아니라 신뢰였다. 그 신뢰를 배신하는 것은 음표를 배신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다.”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쇼스타코비치와 로스트로포비치의 관계는 음악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예술적 우정 중 하나다. 쇼스타코비치는 첼로 협주곡 1번을 작곡하며 단 한 사람을 머릿속에 두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악보를 받아 사흘 만에 외웠고, 그로부터 나흘 뒤 두 사람은 함께 첫 연주를 했다. 그 속도는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스탈린 시대의 탄압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쇼스타코비치에게 로스트로포비치가 어떤 존재였는가다. “슬라바(로스트로포비치의 애칭)가 내 음악을 켤 때 나는 내가 옳다는 것을 안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말이다.
1974년, 로스트로포비치와 아내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는 소련을 떠나 사실상 망명 길에 올랐다. 1978년 소련 국적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1989년 11월 11일 새벽에 찾아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밤, 로스트로포비치는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누가 요청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벽의 잔해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몇 시간 동안. 카잘스가 12년간 연구한 바로 그 음악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다시 울려 퍼진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의 고독은 거대한 역사 속에 던져진 개인의 고독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 첼로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활을 드는 행위는 저항이었고, 그 저항은 아름다웠다.
빼앗긴 고독 — 재클린 뒤프레
1965년, 스무 살의 재클린 뒤프레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존 바비롤리 지휘로 녹음했다. 이 음반을 처음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저 사람은 이 음악을 이미 살았다.” 엘가의 협주곡은 노년의 고독과 상실을 담은 작품이다. 그러나 스무 살 영국 소녀가 그 정서를 이렇게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해가 아니라 직관이었을 것이다. 뒤프레는 느끼는 대로 켰고, 그 느낌이 우연히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과 일치했다.
“나는 첼로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첼로와 함께 호흡한다. 악기가 내 몸의 일부가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 시간이 충분할까?”
— 재클린 뒤프레
그 질문은 예언이었다. 1973년, 스물여덟 살의 뒤프레는 무대에서 활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진단명은 다발성 경화증. 신경계가 서서히 파괴되는 이 병은 첼리스트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열여섯 살에 데뷔하여 불과 10년 남짓 — 그것이 뒤프레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그러나 그 10년이 남긴 것은 방대하다. 엘가 협주곡은 지금도 이 곡의 ‘기준 음반’으로 불린다. 그녀가 활을 잡는 방식, 피아니시모에서 소리가 스러지는 방식, 느린 악장에서 선율을 늘이는 방식 — 이 모든 것이 교과서적인 첼로 주법을 벗어나 있지만 그 어떤 연주보다 설득력이 있다. 공식이 아닌 진심으로 켰기 때문이다.
뒤프레는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쉰두 살이었다. 병상에서도 그녀는 첼로 음악을 들었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다시는 첼로를 켜지 못했다. 뒤프레의 고독은 가장 잔인한 종류였다 — 원하는 것이 있는데 손이 닿지 않는 고독. 그런데도 그 고독이 그녀의 음악을 더 이상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엘가의 선율 속에, 그녀가 스무 살에 낸 첫 음 속에.
같은 악기가 품은 세 가지 상처
카잘스
선택한 침묵
카잘스는 세상이 틀렸을 때 무대를 떠났다. 그 침묵은 도피가 아니라 가장 크게 울린 목소리였다.
로스트로포비치
강요된 추방
로스트로포비치는 권력에 의해 추방당했다. 그러나 베를린의 잔해 앞에서 그가 켠 바흐는 역사보다 오래 남았다.
뒤프레
빼앗긴 악기
뒤프레는 병에 의해 악기를 잃었다. 10년의 연주 속에 평생을 압축한 그녀는 가장 짧고 가장 강렬한 불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세 사람 모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카잘스는 그 곡을 세상에 부활시켰고, 로스트로포비치는 베를린 장벽 앞에서 그것을 켰으며, 뒤프레는 생애 내내 그 곡을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 가져가려 했다. 바흐의 모음곡은 반주가 없다. 첼로 하나가 홀로 선다. 그 구조 자체가 고독이다. 어쩌면 이 세 사람이 그 음악에 끌린 이유가 거기 있다.
카잘스는 “음악은 사랑을 섬기고, 사랑은 생명을 섬긴다”고 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예술은 정치보다 강하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했다. 뒤프레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 그녀가 활을 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세 개의 고독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음악은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첼로는 그것을 켜는 사람의 상처와 신념과 욕망을 담아 울린다. 그리고 그 울림은 연주가 끝난 뒤에도, 심지어 연주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된다.
첼로가 가장 아름답게 울리는 순간은 연주자가 기술을 보여주는 순간이 아니라, 연주자가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 순간이라고 느낄 때다. 카잘스의 프라드 녹음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드보르자크에서, 뒤프레의 엘가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 무게감. 그것은 고독이 소리가 된 순간들이다.
처음 듣는다면 — 추천 감상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집 (1936–1939)
1번 전주곡 첫 8소절. 두 번째 음에서 세계가 바뀐다.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b단조 (1977, 카라얀 지휘)
2악장 중간부에서 오케스트라가 물러나고 첼로가 홀로 남는 순간.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1965, 바비롤리 지휘)
4악장 — 스물 살의 목소리가 노인의 고별을 노래하는 역설을 들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