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Baroque). 포르투갈어로 ‘울퉁불퉁한 진주’를 뜻하는 이 단어는 원래 경멸어였다. 18세기 비평가들이 당시 음악의 과잉과 장식을 비웃으며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과잉이야말로 이 시대 음악의 본질이었다.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유럽의 음악가들은 단순한 선율 대신 복잡한 구조를 택했다. 장식이 아니라 건축을 했다.
그 건축가 중 가장 위대한 세 사람이 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안토니오 비발디. 세 사람은 같은 해인 1685년, 두 사람이 태어났다 — 바흐와 헨델이 나란히. 비발디는 그보다 7년 앞서 태어났다. 세 사람 모두 바로크 음악의 절정을 살았지만, 그들이 세운 건물은 전혀 달랐다. 바흐는 수직의 대성당을 쌓았고, 헨델은 수평으로 넓은 광장을 만들었으며, 비발디는 계절이 지나는 정원을 그렸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1685–1750
질서
대위법의 최후이자 완성. 푸가와 수난곡으로 음악적 논리를 신학적 깊이에 결합했다. 살아생전보다 죽은 뒤 더 위대해진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685–1759
웅장함
오라토리오로 신의 서사를 대중에게 열었다. 오페라 흥행사이자 외교관적 음악가. 《메시아》의 할렐루야는 지금도 청중을 일으켜 세운다.
안토니오 비발디
1678–1741
색채
협주곡 형식을 확립하고 500곡 이상을 남겼다. 바이올린으로 사계절의 빛과 바람을 그렸다. 그의 음악은 가장 먼저 바로크를 대중에게 돌려주었다.
계절을 발명한 자 — 안토니오 비발디
안토니오 비발디는 사제였다. 붉은 머리칼 때문에 ‘빨간 사제’라 불렸다. 그러나 그는 사제복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대신,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오스피탈레 델라 피에타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피에타는 단순한 고아원이 아니었다. 베네치아 귀족들과 유럽 여행자들이 음악을 들으러 찾아오는 살아있는 음악원이었고, 비발디는 그곳의 악장이었다.
그는 거의 병적으로 많은 곡을 썼다. 협주곡만 500곡이 넘는다. 동시대 비평가들은 그를 두고 “같은 협주곡을 500번 썼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이 비판은 오히려 비발디 음악의 핵심을 찌른다. 그는 단일한 형식— 빠르고 느리고 빠른 3악장 구조—을 철저히 반복하면서도, 그 안에 계절, 폭풍, 사냥, 밤을 담았다. 형식의 반복이 아니라 색채의 탐험이었다.
“나는 협주곡 한 곡을 오케스트라 전체가 필사할 시간보다 빠르게 작곡할 수 있다.”
— 안토니오 비발디
그의 대표작 《사계》는 1725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운 협주곡이 아니다. 각 악장에 소네트가 붙어 있고, 바이올린은 새 소리를 흉내 내고, 트레몰로는 폭풍우가 된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음악이 이야기를 말한다. 오늘날 ‘표제음악(programme music)’이라 부르는 장르의 선구였다. 비발디가 죽은 뒤 200년 가까이 잊혔다가 20세기에 재발견된 이 협주곡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바로크 음악 중 하나가 되었다.
비발디의 말년은 쓸쓸했다.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기대하고 빈으로 갔지만, 황제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도 이듬해 1741년, 빈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장례는 극빈자용으로 치러졌다. 베네치아 최고의 음악가가 외지에서 이름 없이 묻혔다.
청중을 일으켜 세운 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헨델은 성공한 음악가의 전형이다. 그는 독일 할레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배웠고, 런던에서 정착해 영국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세 명의 왕을 섬겼다. 조지 1세를 위해 템스 강 위에서 연주된 《수상 음악》을 썼고, 조지 2세를 위해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작곡했다. 왕들이 바뀌어도 헨델은 남았다.
그러나 헨델의 진정한 무대는 왕궁이 아니라 공공 극장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런던에 이식하는 데 인생 중반을 바쳤다. 귀족들을 위한 극장을 운영하고, 직접 대본을 편집하고, 가수를 고용했다. 흥행사였다. 그러나 런던 대중은 변덕스러웠다. 이탈리아 오페라 붐이 꺼지자 그의 극장은 파산했고, 헨델은 두 번이나 채무자 신세가 되었다.
오페라 흥행이 실패하자 그는 방향을 바꿨다. 오라토리오였다. 무대 장치도, 의상도, 연기도 없는 음악만의 드라마. 라틴어 대신 영어로 쓴 신의 이야기. 이것이 런던 중산층의 마음을 열었다. 1741년, 더블린에서 초연된《메시아》는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메시아》를 작곡하는 동안 하늘이 열리고 신이 친히 앞에 계신 것 같았다.”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할렐루야〉 합창이 울리자, 조지 2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왕이 일어서면 모두가 따라 일어서야 한다.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 〈할렐루야〉 합창이 시작되면 전 세계 콘서트홀에서 청중이 기립한다. 음악이 의식을 만들었다.
헨델과 바흐는 동갑이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바흐가 두 번 헨델을 만나러 여행을 계획했지만, 번번이 타이밍을 놓쳤다. 이 만남이 성사되었다면 바로크 음악의 역사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 그것은 음악사 최고의 가정 중 하나다.
신에게 바친 건물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바흐는 음악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가족 중 전문 음악가가 50명이 넘었다. 튀링겐 지방에서 ‘바흐’는 거의 ‘음악가’의 동의어였다. 그는 이 유산 위에 서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을 흡수했다. 이탈리아의 협주곡 형식, 프랑스의 무곡과 장식법, 독일 루터파의 코랄. 그는 그것들을 분해하고 재조합했다.
바흐가 쓴 모든 악보의 마지막에는 ‘SDG’라고 적혀 있다. ‘Soli Deo Gloria’ — 오직 신께 영광을. 이것은 공식적인 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이었다. 바흐에게 음악은 기도와 다르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일한 27년 동안, 그는 매주 새 칸타타를 썼다. 200곡이 넘는 교회 칸타타가 이 시간의 산물이다.
“음악의 목적은 오직 신의 영광과 영혼의 위안이어야 한다. 이 목적이 없는 곳에, 진정한 음악은 없다.”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바흐의 기술적 정점은 대위법이다. 하나의 주제가 다른 목소리들과 교차하고, 뒤집히고,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되면서 거대한 구조를 만든다. 그의《푸가의 기법》은 미완성으로 남겨진 채 그가 눈을 감았다. 마지막 푸가에 B-A-C-H라는 이름이 주제로 삽입되어 있다. 독일음명으로 B♭-A-C-B♮.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음악 속에 서명으로 새겼다.
생전의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교회 음악의 관리자로 살았다. 그는 유럽적 명성이 없었다. 오르간 연주자로는 알려졌지만, 비발디나 헨델처럼 대중에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악보는 팔려나가거나 흩어졌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음악을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829년, 스물 살의 펠릭스 멘델스존이 베를린에서 바흐의《마태 수난곡》을 100년 만에 재연했다. 청중은 압도당했다. 이것이 바흐의 부활이었다. 오늘날 바흐는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베토벤조차 말했다. “그는 시냇물(Bach)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려야 한다.”
같은 시대, 다른 건물
세 사람이 살았던 무대는 달랐다. 바흐는 독일 루터파 교회의 제단 앞에서 신에게 바치는 음악을 썼다. 헨델은 런던의 공연장에서 영국 중산층을 감동시킬 음악을 상업적으로 유통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운하 옆 고아원에서 협주곡을 기계처럼 생산했다. 음악을 향한 동기도, 청중도, 경제적 환경도 달랐다. 그런데도 이 셋은 ‘바로크’라는 하나의 언어를 공유했다. 화성과 대위, 통주저음, 그리고 풍부하고 장식적인 선율.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상호 영향이다. 비발디의 협주곡 형식은 바흐에게 직접 흡수되었다. 바흐는 비발디의 협주곡 여러 곡을 건반 협주곡으로 편곡했다. 그 과정에서 바흐는 이탈리아의 생동감에 독일의 논리를 입혔다.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면서 비발디의 같은 물을 마셨고, 거기에 독일적 정확함과 영국적 웅장함을 더했다. 바로크 음악은 국적을 넘어 순환하는 언어였다.
바로크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1750년, 바흐가 세상을 떠났다. 음악사가들은 이 해를 바로크 시대의 종말로 표시한다. 그러나 종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바흐의 죽음 이후,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새로운 시대 — 고전주의 — 를 열었지만, 그들은 바로크 위에 서 있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형식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영향을 주었다. 비발디의 협주곡 언어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속에 살아있다. 바흐의 대위법은 브람스와 레거를 거쳐 지금까지 작곡 교육의 기초가 된다.
세 사람은 서로 달랐지만, 하나의 시대를 함께 살았다. 그들이 남긴 건물들은 지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사계》는 광고 음악이 되었고, 〈할렐루야〉는 스포츠 경기장에 울리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천문학자들이 우주로 보낸 음반 — 보이저 탐사선의 황금 레코드 — 에 실렸다. 바로크 음악의 건물들은 지구 밖으로도 뻗어 나갔다.
오늘, 비발디의 〈봄〉 첫 소절부터 시작해보라. 바이올린이 폭발하듯 뛰어오르는 그 순간, 300년 전의 베네치아가 지금 당신 귀 안에 살아난다.
처음 듣는다면 — 추천 감상
《사계》 중 〈봄〉 1악장
바이올린이 새가 되는 순간을 들어보라. 음표 하나하나가 이미지다.
《메시아》 중 〈할렐루야〉
합창이 쌓여가는 구조에 집중하라. 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지 느낄 것이다.
《무반주 첼로 조곡 1번》 〈프렐류드〉
악기 하나로 이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선율 아래 저음이 얼마나 깊은지 들어보라.